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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06 12:51, 사랑하기..

대학시절에는 지금처럼 인터넷이 활성화되지 않았다.
실습실의 구석진 곳에는 지금은 구식이 된 커다란 워크스테이션이 하나 있었고..
모자이크 브라우저를 이용해 인터넷을 이용하는 선배를 기웃거리며 신기해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 학과 과방에는 '소리'라는 누구나 글을 쓸 수 있는 노트가 한 권있었다. 신입생 때는 그 노트에 주절주절 떠들어대길 좋아했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실명이 아닌 필명을 대신해 적어 간접적으로 이 글을 누군가 읽어주길 바라는 마음을 표현하곤 했다(적어도 나는 그랬다).

최초의 필명은 '아프락사스'였다. 헤르만헷세의 '데미안'에 나오는 神의 이름이다.그 때에는 많은  갈등과 방황을 겪는 시기였고 경제적으로도 매우 어려운 시기였다. 당연스레 글들은 어둡고 음침하고 때로는 비장하기까지 했었다.

나는 1학년 1학기를 마치고 바로 군에 입대했다.. 서글픔은 2년 2개월이 지나 새로운 희망으로 자라 있었다. 복학하고 난 뒤에는 컴퓨터 실습실에는 윈도우 95가 깔리고 나우누리니 하이텔이니 하는 통신 프로그램이 인기가 있었다. 과방에 있는 '소리'는 명목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이미 많은 자리를 그런 통신 프로그램에 내어주고 있었다. 나는 군대 시절 '六然'이란 필명을 썼다. 굳이 해석하자면 '6가지를 해야한다'라고나 할까? 주로 가훈으로 많이 쓰인다고 하는데 그 6가지의 연은 이렇다.

'自處超然(자처초연)' : 자신에 대해 초월할 줄 알아야 한다.
'處人愛然(처인애연)' : 남에 대해 보살피고 사랑하는 마음을 품을 줄 알아야 한다.
'有事斬然(유사참연)' : 일이 있을 때는 책임지고 임무를 완수해야 한다.
'無事澄然(무사징연)' : 일이 없을 때는 마음을 깨끗이 해야 한다.
'得意澹然(득의담연)' : 뜻을 이루었을 때도 자랑하지 말고 담담할 줄 알아야 한다.
'失意泰然(실의태연)' : 뜻을 이루지 못하였더라도 태연하게 대처할 줄 알아야 한다.

제대 후에는 스스로 많은 성장을 겪은 후였고 또한 많은 자신감을 회복하던 때였다. 이 필명을 쓸 때의 글들은 대체로 철학적이고 따뜻한 글들이 많았던 것 같다.

그러던 중 나역시 실습실에 드나드는 기회가 많아지면서 나우누리 게시판에 글을 쓸 기회가 잦아졌다. 온라인 게시판에는 'kissing'이란 필명을 사용했다. 이 필명은 '쉬리'라는 영화가 나오기 전에 사용한 것으로 '키싱구라미'와는 전혀 무관하다. 또한 이 필명을 생각했던 계기는 '키스'자체가 아닌 '키스와 같은 강렬한 느낌'을 나타내고자 했던 것이었다(실제로 이 필명을 쓸 때도 난 키스를 해 본적이 없다. 아내와 만난 2000년 10월 7일이 내 첫키스 날로 기억한다). 이 필명을 쓸 때는 낭만적인 글들을 많이 썼다. 때론 시가 되기도 하고 때론 넋두리가 되기도 하는 글들이지만 지금 생각해도 가장 사랑스런 글들을 쓴 시기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프로그래머를 직업으로 삼은 이유로 글을 쓸 기회는 현저히 줄어들었다. 필명은 이제 옛날 얘기가 되었고 이제는 스크롤을 해야 하는 긴 글들을 잘 읽지 못하는 조급함이 날 지배한다. 이제 나는 핵심을 요구하고 주제를 파악하기 위해 노력한다. 작자의 행간의 여운이라던가 숨겨진 의도, 감정 등을 상상할 만큼의 여유조차 없어져 버렸다.

그럼에도 나는 '행복'을 꿈꾼다. 아내와 만난 뒤 아내가 생각해 낸 아이디 중 하나가 'Happying'  이다. 문법에도 안 맞는 이 정체 불명이 낱말이 주는 느낌이 좋다. 난 지금 행복하다는 느낌 그리고 이 행복이 계속 지속될 것 같은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의 MSN 닉은 '언제나 행복하세요 :)'다. 예전엔 '행복'을 꿈꾸었지만 지금의 '행복'은 진행형이다.

나는 지금 이순간을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다.


(곡명: We Kiss in a Shadow @ stream.shumtoh.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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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형 | 2006.12.08 16:13 | PERMALINK | EDIT/DEL | REPLY

글이 참 이기중주임님을 닮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조용히 절제된 것 같으면서도 강하게 여운을 남기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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